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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글쓰기]창조신, 혼돈 위에 질서 세우기

reco-content 2025. 11. 5. 16:44

우리가 “세계관”을 짤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시작을 어떻게 열 것인가다. 인류의 다채로운 신화가 공통으로 붙잡은 답은 창조신이다. 창조신은 말 그대로 ‘무(無)나 혼돈’에서 우주와 땅, 생명과 규범을 끌어내는 첫 행위자다. 흥미로운 점은, 문화가 달라도 창조의 패턴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는 것. 이를 알면 블로그 글감도, 창작 세계관의 뼈대도 단단해진다.

1) 혼돈에서 질서로

대부분의 신화는 **무정형의 혼돈(카오스)**을 전제로 한다. 누군가는 말을 내뱉어 세계를 세우고(말=법=로고스), 누군가는 손으로 흙을 빚고,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 몸을 해체해 하늘·땅·바다를 만든다. 이 전환의 핵심은 “경계 짓기”—위·아래, 빛·어둠, 생명·무생물의 선을 그어 규칙을 확정하는 일이다. 세계관 설계에서도 이 단계가 곧 물리 법칙과 윤리 규범의 시원이 된다.

혼돈과 창조

2) 창조 도구의 네 가지 유형

  • 말의 창조: 신의 이름 부름·선언으로 실재가 성립. 질서·법률·주술이 강한 세계관과 궁합이 좋다.
  • 손의 창조: 흙·나무·금속을 빚어 만든다. 장인신·기술·문명의 서사와 어울린다.
  • 희생의 창조: 거인 혹은 신의 몸을 쪼개 우주를 구성. 세계가 책임 위에 서 있다는 도덕적 뉘앙스를 준다.
  • 부부/짝의 창조: 하늘·땅의 결합, 신부-신랑의 순환. 생식·계절·농경 주기를 중심에 둔다.

3) 지역별 모티프 한 스푼

  • 메소포타미아에선 혼돈의 바다를 상징하는 존재를 제압하고 그 몸으로 하늘과 땅을 만든다. 승리로 세워진 질서, 즉 왕권과 법전의 논리가 두드러진다.
  • 이집트는 원초의 물 위로 솟는 첫 흙더미와, 그 위에서 스스로 태어나 세상을 ‘말’로 배열한 신을 말한다. 의식·이름·질서가 곧 창조다.
  • 그리스 전통은 원초적 틈(카오스) 다음에 대지·하늘·사랑의 힘이 차례로 등장하여 세대를 거듭하는 계보의 드라마를 펼친다.
  • 북유럽은 얼음과 불의 경계에서 생긴 거인의 희생으로 우주가 성립한다. 추위와 전쟁의 세계관, 파괴와 재창조의 순환이 강렬하다.
  • 동아시아는 거인의 분해, 또는 누군가가 끊어진 하늘을 보수해 세상의 균형을 맞춘다. 창조는 ‘처음 만들기’이자 ‘계속 유지·수선하기’다.
  • 폴리네시아/오세아니아 전통에서는 껍질 같은 어둠을 깨거나, 부모격의 신들이 서로 떨어지며 빛이 스며든다. 분리와 거리두기가 곧 창조다.

4) 창조신의 성격: 장조자, 통치자, 혹은 은둔자

창조신이 곧 최고신인 경우도 있지만, 많은 신화에서 창조와 통치는 분리된다. 어떤 창조신은 세계를 세팅한 뒤 물러나고(은둔), 현장의 통치는 폭풍·전쟁·지혜의 신이 맡는다. 또 간혹 트릭스터가 창조의 ‘오류 수정’ 역할을 한다—불을 훔치거나, 언어·농경·도구를 퍼뜨려 세계를 살게 한다. 이는 현대 세계관에서 “엔지니어링 팀(창조) vs. 운영·거버넌스 팀(통치)”로 비유할 수 있다.

5) 왜 사람을 만들까?

사람 창조에는 세 가지 동기가 반복된다.

  1. 노동 분담: 신들의 수고를 덜기 위해.
  2. 경배·기억: 의식과 노래로 질서를 유지하도록.
  3. 동반자: 신과 대화할 존재.
    이 동기는 곧 인간의 의무와 자유를 설명하는 장치가 되고, 실패(홍수·추방·언어 혼란)는 재설계 에피소드가 된다.

6) 글 쓰는 이를 위한 세계관 체크리스트

  • 혼돈의 성격은?(물/어둠/침묵/무한) → 어떤 질서를 원하나?
  • 창조 방식은?(말/손/희생/분리) → 사회 규범의 근거가 된다.
  • 창조와 통치의 분업은 있는가? 은둔한 설계자 vs. 현장 운영자.
  • 인간의 역할은? 노동·예배·기억·반항 중 무엇이 핵심인가.
  • 유지보수 신화: 균열, 대홍수, 하늘 보수 같은 사건으로 세계 안정성을 설계하라.

창조신은 단순한 ‘시작 버튼’이 아니다. 질서의 철학, 권력의 정당화, 인간의 과제를 동시에 코딩하는 최초의 스크립트다. 이 틀을 이해하고 변주하면, 당신의 블로그 연재는 신화 소개를 넘어 독자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하게 만드는 질문으로 확장될 것이다. 다음 편에서는 ‘대지모신·하늘신’의 역할 분담과, 그 사이에서 탄생하는 영웅의 서사를 다뤄보자.